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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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에트 마리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로, 1625년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지녔으며, 남편 찰스 1세가 스페인과의 혼담을 거부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구하면서 결혼이 성사되었다. 결혼 초에는 종교적 차이와 프랑스 출신 수행원 문제로 부부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점차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잉글랜드 내전 중에는 왕당파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조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1660년 왕정복고 후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1669년 아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예술 후원자로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지원했으며, 8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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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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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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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잉글랜드 왕비, 스코틀랜드 왕비, 아일랜드 왕비 |
재위 | 1625년 6월 13일 – 1649년 1월 30일 |
배우자 | 찰스 1세 (1625년 결혼, 1649년 사망) |
자녀 | 찰스 2세 메리, 프린세스 로열 제임스 2세 엘리자베스 앤 헨리, 글로스터 공작 앙리에타, 오를레앙 공작 부인 |
가문 | 부르봉 가문 |
아버지 | 앙리 4세 |
어머니 | 마리 드 메디시스 |
출생일 | 1609년 11월 25일 |
출생 장소 | 루브르 궁, 파리,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669년 9월 10일 |
사망 장소 | 콜롱브 성, 콜롱브, 프랑스 왕국 |
매장일 | 1669년 9월 13일 |
매장 장소 | 생드니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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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정보 | |
배우자 | 찰스 1세 |
결혼일 | 1625년 |
사망일 | 1649년 |
사망 원인 | 사망 |
2. 생애
앙리에트 마리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 드 메디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1609년 11월 25일 루브르 궁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출생일을 11월 26일로 기록하기도 하고,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던 잉글랜드에서는 11월 16일로 기록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교 신앙으로 성장했으며, 훗날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아버지 앙리 4세는 그녀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610년 5월 14일에 암살당했다. 어린 시절, 왕실 유모 프랑수아즈 드 몽글라의 감독 아래 양육되었다.
앙리에트 마리는 언니들과 함께 승마, 춤, 노래를 배웠고, 궁정 연극에 참여했다.[89] 독서와 쓰기를 배웠지만 학문적인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89] 종교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 궁정의 갈멜회 수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89] 1622년까지 200명 정도의 하인들과 함께 파리에서 생활했으며, 결혼 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했다.[90]
1625년 6월 13일, 15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켄트 주 캔터베리에 있는 세인트 오거스틴 교회에서 결혼했다.[197] 찰스 1세는 원래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혼담이 오갔으나, 종교 문제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197]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앙리에타 마리아는 종교상의 이유로 성공회[198] 방식의 잉글랜드 대관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결혼 초기, 앙리에트 마리아는 보석, 화려한 옷, 10000프랑스 리브르 상당의 식기, 샹들리에, 그림, 책 등 값비싼 물품들을 많이 가져왔다. 또한 시녀, 12명의 오라토리안 사제, 시종을 포함한 크고 값비싼 수행원을 동반했다. 찰스 1세는 이들을 결혼 생활의 좋지 않은 시작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1626년 6월 26일 그들을 해고하라고 명령했다.
혼인 초 앙리에트 마리아와 찰스 1세는 종교와 성격 차이, 그리고 앙리에트 마리아가 데려온 많은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교회 수행원들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의 체류비는 잉글랜드 왕실에 큰 부담이 되었고, 결국 찰스 1세는 가톨릭 사제와 시녀 2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행원을 프랑스로 돌려보냈다.[196]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는 왕의 총신으로서 부부 사이를 더욱 악화시켰다.[196] 앙리에트 마리아는 남편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버킹엄 공작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1628년 8월 23일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자, 부부 관계는 곧 좋아졌다.[199][200][201]
1641년 가을, 아일랜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197] 이 봉기는 해묵은 종교 갈등이 원인이었다. 주교 전쟁의 뒷처리와 아일랜드 봉기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찰스 1세는 의회와 충돌하였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1642년 8월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앙리에타 마리는 유럽 대륙에 있었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왕비는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왕당파를 위한 원조금을 모았다. 1643년 초 잉글랜드에 입국하여 요크셔 주 브리들링턴에 상륙했다. 요크에 본부를 설치하고 남아 있던 왕실 세력과 합류했다.
찰스 1세와 옥스퍼드에서 재회하기까지 앙리에타 마리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인들과 함께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1644년 4월 앙리에타 마리가 출산을 위해 엑서터로 떠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전 상황이 악화되자 앙리에타 마리는 막내 헨리에타 앤을 출산한 직후인 1644년 7월,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프랑스 왕실의 무관심 속에 고단했다. 1649년 1월, 남편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에 공화정이 세워지자,[208]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으며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210] 앙리에타 마리아는 1660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중의 환영은 거의 없었고, 사무엘 피프스는 그녀를 "매우 작고 평범한 늙은 여자"라고 묘사했다.[72] 그녀는 서머싯 하우스에 거주하며 관대한 연금을 받았다.
1661년, 앙리에타 마리아는 막내딸 헨리에타[191]와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갔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관계를 크게 도왔다.[192]
1662년, 앙리에타 마리아는 찰스 2세, 루퍼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193] 1665년 기관지염으로 고통받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190]
1669년 8월, 손녀 안나 마리아가 태어났다. 얼마 후 앙리에타 마리아는 콜롱브 성에서 사망했는데,[194] 사인은 아편 과다 복용이었다.[190] 그녀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고, 심장은 샤이요의 수녀원에 안치되었다.[195]
콩데 미술관 소장
2. 1. 유년기
앙리에트 마리는 1609년 프랑스 루브르 궁전에서 앙리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르봉 왕가의 딸로서 ''Fille de France''였으며, 루이 13세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앙리에트 마리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녀는 1609년 11월 25일에 태어났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출생일을 11월 26일로 기록하기도 한다.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던 잉글랜드에서는 그녀의 출생일을 11월 16일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앙리에트 마리는 로마 가톨릭교 신앙으로 길러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610년 5월 14일에 암살당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왕실 유모 프랑수아즈 드 몽글라의 감독 아래 양육되었다.
앙리에트 마리는 언니들과 함께 승마, 춤, 노래를 배웠고, 궁정 연극에 참여했다.[89] 독서와 쓰기를 배웠지만 학문적인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89] 그녀는 종교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 궁정의 갈멜회 수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89] 1622년까지 앙리에트 마리는 200명 정도의 하인들과 함께 파리에서 생활했으며, 결혼 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했다.[90]
2. 2. 결혼 생활
앙리에트 마리아와 찰스의 결혼 생활은 초기에는 순탄치 않았다. 프랑스인 수행원들을 내쫓으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8] 앙리에트 마리아는 국왕의 총애를 받던 조지 빌리어스 제1대 버킹엄 공작을 즉시 싫어했다.[18]결혼 초 앙리에트 마리아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 중 한 명은 루시 헤이였다. 그녀는 결혼 협상을 도왔고 찰스의 시종이었다. 루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뛰어난 미모와 강한 개성을 지녔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녀가 버킹엄의 정부라고 믿었고, 앙리에트 마리아도 그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루시가 그의 뜻에 따라 새로운 여왕을 조종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8년 여름까지 둘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고, 헤이는 여왕의 시녀 중 한 명이 되었다.[19]
1628년 8월, 버킹엄이 암살되면서 앙리에트 마리와 찰스의 관계는 개선되기 시작했고, 둘은 깊은 사랑과 애정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앙리에트 마리는 1628년에 처음 임신했지만, 힘든 출산 끝에 1629년에 첫 아이를 잃었다. 1630년 훗날 찰스 2세가 태어났지만, 의사 테오도르 드 마예른의 도움을 받아 또 한 번의 복잡한 출산을 겪었다.[21] 앙리에트 마리는 버킹엄의 역할을 이어받아 찰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찰스의 궁정은 프랑스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프랑스어는 더 예의 바른 언어로 여겨져서 영어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다.[6] 찰스는 앙리에트 마리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고, "사랑하는 이여"라고 시작했다. 1645년 1월 11일, 찰스는 "나는 그대의 곁을 즐기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어떤 고통도 감내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라고 썼다.[22]
앙리에트 마리는 1634년에 루시 헤이와 헤어졌다. 구체적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둘은 이전에도 의견 차이를 보였다. 헤이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고, 여왕보다 더 방탕한 삶을 살았으며, 앙리에트 마리는 자신감 있고 아름다운 헤이에게 가려진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몇 년 동안 여왕의 새로운 가구가 그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헨리 저민은 1628년에 그녀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자 부시종장이 되었다. 덴비 백작 부인은 여왕의 의상 담당자와 측근이 되었다. 앙리에트 마리아는 제프리 허드슨[8]과 "작은 사라"를 포함한 몇몇 궁정 난쟁이를 얻었다. 1630년까지 서머셋 하우스, 그리니치 궁전, 오틀란스, 넌서치 궁전, 리치몬드 궁전 및 홀덴비에 결혼 지참금 토지를 설립했다. 1639년에 윔블던 하우스를 추가했는데, 이는 찰스가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16] 그녀는 또한 개, 원숭이, 새가 들어있는 사육장을 얻었다.[9]

앙리에트 마리아는 예술에 강한 관심을 보였으며, 다양한 활동에 대한 후원은 궁정 행사를 형성하려 했던 여러 방식 중 하나였다.[7] 그녀와 찰스는 그림의 "헌신적이고 지식이 풍부한 수집가"였다.[16] 특히 이탈리아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후원으로 유명했는데, 그는 1626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수아 드 바솜피에르의 수행원과 함께 영국으로 왔다. 오라치오와 그의 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그리니치에 있는 여왕의 집의 거대한 천장화를 담당했다. 귀도 레니는 또 다른 인기 있는 예술가였으며, 미니어처 화가 장 프티토와 자크 부르디에와 함께 활동했다. 안토니 반 다이크는 그녀가 종종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개인적인 감상을 위해 의뢰하는 또 다른 매우 중요한 화가였다.
앙리에트 마리아는 스튜어트 가면극의 핵심 후원자가 되었으며, 회화와 시각 예술에 대한 남편의 강한 관심을 보완했다.[23] 윌리엄 데버넌트의 1640년 작품 "살마시다 스폴리아"에서 아마존 역을 포함하여 다양한 작품에 직접 출연했다.[7] 또한 영국 작곡가 니컬러스 라니에의 후원자였으며, 1638년 데버넌트가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왕은 조각과 디자인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630년대에 디자이너 이리고 존스를 작품 감리관으로 고용했다. 찰스처럼 정원 디자인에 열정적이었지만, 원예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앙드레 몰레를 고용하여 윔블던 하우스에 바로크 정원을 만들었다. 위그노 조각가 위베르 르 쉬르를 후원했으며, 그녀의 개인 예배당은 외관은 소박했지만, 내부에는 금과 은의 유물함, 그림, 조각상, 예배당 정원, 루벤스의 웅장한 제단화가 있었다.[24] 프랑수아 디에사르가 디자인한 특이한 성체 현시대가 있었다.[24]
앙리에트 마리아는 상업 연극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많은 배우, 극단, 극장에 대한 주요 후원자였다. 그녀의 연극 후원과 관련하여 주요 인물은 크리스토퍼 비스턴인데, 그는 비스턴의 소년들로 알려진 자신의 배우 극단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여왕 앙리에트의 남자들과 같은 다른 극단도 운영했다.[25] 후자의 극단은 햄프턴 코트나 덴마크 하우스와 같은 많은 궁정에서 공연했다. 이러한 연극은 토머스 헤이우드와 같은 다른 연극 인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26]
2. 2. 1. 정략결혼
1625년 6월 13일, 15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와 켄트 주 캔터베리에 있는 세인트 오거스틴 교회에서 결혼했다.[197] 찰스 1세는 원래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안나 마리아와 혼담이 오갔으나, 종교 문제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197] 당시 잉글랜드 내에서는 '스페인-가톨릭 커넥션'을 반 잉글랜드적 태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찰스의 혼인 협상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찰스 1세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197]앙리에타 마리아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종교상의 이유로 성공회[198] 방식의 잉글랜드 대관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결혼 당시 15세였던 앙리에트 마리아는 당시 왕족 공주들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앙리에트 마리아와 찰스 1세의 대리 결혼은 1625년 5월 1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슈브뢰즈 공작 클로드가 찰스를 대리했다. 그 후 1625년 6월 13일 부부는 캔터베리 근처 세인트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첫날밤을 보냈다.[4]
앙리에트 마리아의 외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그녀의 조카인 하노버의 소피아는 반 다이크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고 앙리에트 마리아를 아름다운 여인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만난 후에는 그녀의 팔이 길고 가늘며, 어깨는 고르지 않고, 이빨 중 일부는 엄니처럼 튀어나왔다고 기록했다.[3] 그러나 그녀는 예쁜 눈, 코, 좋은 안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3]
결혼 초기, 앙리에트 마리아는 보석, 화려한 옷, 10000프랑스 리브르 상당의 식기, 샹들리에, 그림, 책 등 값비싼 물품들을 많이 가져왔다. 또한 시녀, 12명의 오라토리안 사제, 시종을 포함한 크고 값비싼 수행원을 동반했다. 찰스 1세는 이들을 결혼 생활의 좋지 않은 시작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1626년 6월 26일 그들을 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앙리에트 마리아를 크게 화나게 했으며, 일부는 프랑스 국왕의 명령을 인용하며 떠나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들은 물리적으로 쫓겨났지만, 앙리에트 마리아는 그녀의 사제이자 고해 신부인 로버트 필립, 프랑스 직원 7명, 간호사 프랑수아즈 드 몽보디악, 마담 가르니에, 드레서 마르그리트 쿠르탱, 마담 드 방텔레, 요리사, 제빵사, 빵 담당자, 재단사를 유지했다.[13][14]
앙리에트 마리아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솔직했고,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라 범죄였던 가톨릭 결혼을 용이하게 했다.[12]
2. 2. 2. 부부 불화와 관계 회복
혼인 초 앙리에트 마리아와 찰스 1세는 종교와 성격 차이, 그리고 앙리에트 마리아가 데려온 많은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교회 수행원들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들의 체류비는 잉글랜드 왕실에 큰 부담이 되었고, 결국 찰스 1세는 가톨릭 사제와 시녀 2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행원을 프랑스로 돌려보내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196]새 왕국에 적응하지 못한 앙리에트 마리아가 모국인 프랑스를 향해 창가에 자주 서 있는 모습이 목격되자, 찰스 1세는 화가 나서 그녀를 멀리했다. 이후에도 부부는 만날 때마다 다투고 반목하며 몇 주간 만나지 않았고, 다시 만나면 서로 공격하기 일쑤였다.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는 왕의 총신으로서 부부 사이를 더욱 악화시켰다.[196] 앙리에트 마리아는 남편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버킹엄 공작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1628년 8월 23일 버킹엄 공작이 암살당하자, 부부 관계는 곧 좋아졌다.[199][200][201] 버킹엄 공작은 선왕 제임스 1세 때부터 총신이었으나, 여러 실정을 거듭하여 잉글랜드 국민들이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찰스 1세가 의회와 대립하게 된 것도 버킹엄 공작의 실정 때문이었다.[202] 그가 암살당하자 잉글랜드 국민들은 거리에 나와 환호할 정도였다.[203]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나 스태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 같은 잉글랜드 내 실력자들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앙리에타 마리아와 찰스 1세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경계했다. 왕비의 영향력이 커져 찰스 1세가 친-로마 가톨릭, 친프랑스 성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630년경 왕권과 신권의 충돌로 잉글랜드 정계가 갈등에 빠지면서 앙리에타 마리아의 국정 참여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앙리에타 마리아는 스페인과의 외교를 추구했던 청교도 관리와 의원들을 혐오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에게 동정심을 느껴 1638년 예수회 수사 리처드 블런트의 장례 미사를 서머싯 하우스에서 치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혼 초 앙리에트 마리아가 마음을 연 잉글랜드인 중에는 칼라일 백작 부인 루시 헤이가 있었다. 루시는 경건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뛰어난 미모와 개성으로 칭송받는 여성이었다. 당시 루시는 버킹엄 공작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며, 앙리에트 마리에게 접근한 것은 새로운 왕비 밑에서의 버킹엄 공작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114]
그러나 1628년 8월 버킹엄 공작이 암살되자, 찰스 1세에게 그동안 버킹엄 공작이 담당했던 역할을 수행하는 신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앙리에트 마리와 찰스 1세의 관계는 급속도로 깊어져 강한 신뢰와 애정 관계를 구축했고,[115] 앙리에트 마리와 찰스 1세 사이에는 밝은 농담이 끊이지 않았다.[116]
1634년 앙리에트 마리아는, 그동안 마음에 들어했던 루시 헤이와의 교제를 완전히 중단하고 찰스 1세와 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120] 앙리에트 마리와 루시가 사이가 나빠진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인 앙리에트 마리에게는, 경건한 개신교도였던 루시의 생활이 방종하게 보였고, 더욱이 루시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그 미모에 어떤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121]
2. 2. 3. 비숍 전쟁과 가톨릭 지원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남편 찰스 1세는 왕권을 견제하는 의회의 존재를 부당하게 생각했다.[204]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인 스튜어트 왕조는 잉글랜드 내 지지 기반이 약했다. 게다가 여러 실정이 거듭되면서 의회와 자주 갈등했다. 30년 전쟁에 잉글랜드가 참전했으나 연패하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찰스 1세는 전비 충당을 위해 의회와 대립하다 단독으로 증세를 추진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찰스 1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배 의식을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205] 스코틀랜드가 반발하자 찰스 1세는 이를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1640년에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주교 전쟁'이라 불린다. 의회의 지원 없이 치른 전쟁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막대한 배상금 지급을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206]
앙리에타 마리아는 전쟁 시작 이전부터 남편 찰스 1세를 돕기 위한 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 대상이 교황 우르바노 8세와 모국인 프랑스 왕실 등 주로 가톨릭 교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잉글랜드인의 분노를 샀다.
2. 3.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는 왕권신수사상을 신봉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의회를 부당하게 생각했다.[204]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 스튜어트 왕조는 잉글랜드 내 지지 기반이 약했고, 여러 실정으로 의회와 자주 갈등했다. 잉글랜드가 30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연패하면서 재정이 악화되자, 찰스 1세는 전비 충당을 위해 의회와 대립하다 단독으로 증세를 추진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 의식을 강요하며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205] 스코틀랜드가 반발하자 1640년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206] 앙리에타 마리는 전쟁 전부터 남편을 돕기 위해 우르바노 8세와 프랑스 왕실 등 가톨릭 교계에서 자금을 모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잉글랜드인들의 분노를 샀다.
1640년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영어) 또는 세 왕국 전쟁으로 불리는 갈등에 휩싸였다. 잉글랜드 내에서는 왕당파와 의회주의자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앙리에트 마리는 이 갈등에 깊이 관여하여 남편의 죽음과 프랑스로의 망명을 초래했다.
앙리에트 마리의 내전 시기 역할과 왕당파 패배에 대한 책임 정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그녀가 유약한 남편을 잘못 이끈 강인한 여성이라고 보았다. 역사학자 웨지우드는 앙리에트 마리가 찰스에게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는 종교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 대해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언급했다.[27] 1970년대의 재해석은 앙리에트 마리의 정치적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국왕이 더 많은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고 주장했다.[133] 퀸턴 본은 찰스가 앙리에트 마리와 친밀했지만, 국정 문제에 대해 그녀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29] 더 최근의 모델은 앙리에트 마리가 정치적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녀의 행동이 찰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135]
1630년대 말, 잉글랜드 파벌 간의 관계는 종교, 사회, 도덕, 정치 권력에 대한 논쟁으로 긴장되었다. 앙리에트 마리의 종교와 궁정 생활에 대한 견해는 1642년까지 그녀를 "매우 인기가 없는 여왕"으로 만들었다.[20]
앙리에트 마리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동정심을 보였고, 1632년 서머싯 하우스에 새로운 가톨릭 예배당을 건설했다. 이전 예배당은 개신교도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이를 철거하자는 이야기가 많았다.[24] 앙리에트 마리의 예배당은 1636년에 성대한 의식으로 문을 열었고, 이는 개신교 공동체에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24] 앙리에트 마리의 종교 활동은 현대적인 가톨릭교를 잉글랜드에 가져오는 데 집중했다.[20] 역사학자 케빈 샤프는 1630년대 말까지 잉글랜드에 최대 3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34] 찰스 1세는 고위급 개종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34] 앙리에트는 1638년 사망한 리처드 블런트 신부, S.J.의 장례 미사를 개인 예배당에서 열었다. 그녀는 1630년대 가면극에 출연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사회의 청교도적인 측면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0]
개신교 잉글랜드 사회에서 앙리에트 마리에 대한 불관용은 증오로 바뀌었다. 1630년, 스코틀랜드 의사 알렉산더 레이턴은 앙리에트 마리를 비판하는 팸플릿을 썼다는 이유로 채찍질, 낙인, 신체 훼손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6] 1630년대 말, 변호사 윌리엄 프린은 여성 배우들이 창녀라고 썼다는 이유로 귀가 잘렸다.[9] 런던 사회는 앙리에트 마리가 1641년 아일랜드 반란에 대해 비난받을 것이라고 여겼다.[113] 앙리에트 마리는 1630년대에 찰스 1세와 사생활을 원했고 궁정 행사 비용 때문에 대중 사회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런던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22]
1641년까지 존 핌이 이끄는 의회파 동맹은 찰스 1세에게 압력을 가했다. 의회는 국왕의 고문인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토머스 웬트워스, 스트래퍼드 백작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핌은 찰스 1세에게 더 많은 압력을 가하기 위해 앙리에트 마리에게 관심을 돌렸다. 1641년 말 의회에서 통과된 대항의서는 여왕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로마 가톨릭 음모의 일부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31] 앙리에트 마리의 측근인 헨리 제르민, 세인트 알반스 백작은 1641년 제1차 군사 음모 이후 대륙으로 도망쳐야 했다.
앙리에트 마리는 찰스 1세에게 핌과 그의 동료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도록 격려했다. 그녀는 1642년 1월 국왕이 의회 적들을 체포하도록 부추겼다고 널리 믿어지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122] 프랑스 대사 마르키 드 라 페르테-임보는 여왕에 대한 공격으로 프랑스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지만, 찰스 1세의 프랑스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에도 감명을 받지 못했다.[32] 그는 주의를 기울이고 핌과 화해할 것을 권고했다.[32] 체포는 엉망이 되었고, 핌과 그의 동료들은 앙리에트 마리의 옛 친구 루시 헤이의 제보로 인해 찰스 1세의 병사들로부터 탈출했다.[33] 반왕당파의 반발이 본격화되면서 앙리에트 마리와 찰스 1세는 화이트홀에서 햄프턴 궁전으로 물러났다.[33]
상황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고, 2월 앙리에트 마리는 자신의 안전과 가톨릭 신앙, 국왕과의 친밀함에 대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헤이그로 떠났다.[34] 헤이그는 앙리에트의 장래 사위인 오렌지 공 윌리엄 2세의 자리였고, 여왕은 10살 된 딸 메리를 데려갈 예정이었다. 또한, 여왕의 옛 총애자였던 루퍼트 왕자의 어머니이자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보헤미아 여왕이 이미 헤이그에서 살고 있었다. 헤이그는 은행 및 금융의 주요 중심지였고, 여왕은 그곳에서 남편을 돕기 위한 자금을 모금할 의도였다.
2. 3. 1. 내전 발발과 국외 활동
1641년 가을, 아일랜드에서 종교 갈등으로 인해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197] 비숍 전쟁의 뒷처리와 아일랜드 봉기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찰스 1세는 의회와 충돌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1642년 8월 분쟁이 시작될 당시, 앙리에타 마리아는 유럽 대륙에 있었다. 왕비는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며 왕당파를 위한 원조금을 모았다. 1643년 초, 잉글랜드 동해안 요크셔 주 블리들링턴에 상륙한 그녀는 요크에 본부를 설치하고 남아있던 왕실 세력과 합류했다.2. 3. 2. 내전 중 찰스 1세와의 관계
1641년 가을, 아일랜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197] 이 봉기는 해묵은 종교 갈등이 원인이었다. 주교 전쟁의 뒷처리와 아일랜드 봉기 등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찰스 1세는 의회와 충돌하였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1642년 8월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앙리에타 마리는 유럽 대륙에 있었다.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왕비는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왕당파를 위한 원조금을 모았다. 1643년 초 잉글랜드에 입국하여 요크셔 주 브리들링턴에 상륙했다. 요크에 본부를 설치하고 남아 있던 왕실 세력과 합류했다.찰스 1세와 옥스퍼드에서 재회하기까지 앙리에타 마리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군인들과 함께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1644년 4월 앙리에타 마리가 출산을 위해 엑서터로 떠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전 상황이 악화되자 앙리에타 마리는 막내 헨리에타 앤을 출산한 직후인 1644년 7월,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했다. 갓 태어난 헨리에타 앤은 모르톤 부인에게 맡겨 잉글랜드에 남겨두었다.[207] 막내딸은 2년 후 프랑스로 건너와 상봉하게 되었다.
2. 3. 3. 망명과 찰스 1세의 처형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프랑스 왕실의 무관심 속에 고단했다. 1649년 1월, 남편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에 공화정이 세워지자,[208]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으며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사실 프랑스 왕실 역시 30년 전쟁에 참전 중이었고,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이후에도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증세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으로 일어난 프롱드의 난으로 인해 루이 14세와 앙리에타 마리의 가족은 파리를 탈출하여 숨어 지내며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후, 앙리에타 마리는 케넬름 딕비 경을 자신의 재무 관리인으로 삼아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루브르궁에서 머물렀지만, 당시 루브르는 파리를 싫어했던 조카 루이 14세와 올케 안 도트리슈에게 버려진 상태여서 생활이 어려웠다. 앙리에타 마리아는 성공회를 믿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왕관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망명 왕당파들과 자신의 장남 찰스가 막내아들 헨리를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자 몹시 화를 냈다.
내전 기간 동안 남편 찰스 1세를 돕던 장남 찰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후 1651년 잉글랜드와 전쟁을 일으켰으나, 우스터 전투에서 패배한 후[209] 유럽을 떠돌며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차남 제임스는 프랑스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앙리에타 마리는 막내딸을 교육하며 미래를 대비했다.
오스트리아의 안과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앙리에타 마리는 파리에 정착하여 케넘 디그비 경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생제르맹앙레 성-뇌프에 왕당파 망명 궁정을 세웠다.[62] 1646년에는 찰스 왕세자(훗날 찰스 2세)가 앙리에타 마리와 함께 파리에 합류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왕세자는 프랑스의 가톨릭 친구로 비춰질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63]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왕당파의 노력이 계속 실패하자, 1646년 7월에 찰스 왕세자는 결국 어머니와 합류하기로 결정했다.[64]
앙리에타 마리는 프랑스에서 점점 더 우울하고 불안해했으며,[185] 찰스에게 잉글랜드의 장로교 정부를 받아들여 의회를 무너뜨리고 잉글랜드를 재침공하기 위한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얻도록 설득하려 했다. 1647년 12월, 찰스가 평화 협정으로 의회에서 제안한 "4개 법안"을 거부하자 앙리에타 마리는 경악했다.[65] 그러나 찰스는 잉글랜드에 장로교 정부를 약속하는 "약혼"에 스코틀랜드와 비밀리에 서명했다.[65] 그 결과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지만, 앙리에타 마리의 제한적인 군사 원조에도 불구하고,[66] 1648년에 스코틀랜드의 패배와 찰스가 의회군에 의해 포로로 잡히면서 전쟁은 끝났다.[66]
1649년 의회의 포고령에 따라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앙리에타 마리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고,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다.[31] 게다가 프롱드의 프랑스 내전으로 인해 그녀의 조카인 루이 14세 국왕마저도 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제3차 잉글랜드 내전 동안, 왕당파 전체가 생제르맹에 근거지를 두었고, 앙리에트 마리의 추종자들은 오먼드와 인치퀸, 그리고 그녀가 특히 싫어했던 클래런던과 합류했다.[68] 1654년, 찰스 2세는 궁정을 쾰른으로 옮기면서 생제르맹에서 앙리에트 마리의 영향력은 사라졌다.[69]
2. 4. 왕정복고와 말년
1649년 남편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에 공화정이 세워진 후, 앙리에타 마리아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208] 프랑스 역시 30년 전쟁과 프롱드의 난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프롱드의 난 진압 후, 앙리에타 마리아는 케넘 디그비 경을 재무 관리인으로 삼아 파리에 정착했다. 루브르궁에서 머물렀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다.왕정 복고가 이루어지자[210] 앙리에타 마리아는 1660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중의 환영은 거의 없었고, 사무엘 피프스는 그녀를 "매우 작고 평범한 늙은 여자"라고 묘사했다.[72] 그녀는 서머싯 하우스에 거주하며 관대한 연금을 받았다.
앙리에타 마리아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것은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제임스와 에드워드 하이드의 딸 앤 사이의 관계 때문이었다. 앤은 임신 중이었고, 제임스는 결혼을 제안했다.[188] 앙리에타 마리아는 하이드를 싫어했고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찰스 2세가 동의하여 결혼이 성사되었다.[189]
1661년, 앙리에타 마리아는 막내딸 헨리에타[191]와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갔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관계를 크게 도왔다.[192]
1662년, 앙리에타 마리아는 찰스 2세, 루퍼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193] 1665년 기관지염으로 고통받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190]
1669년 8월, 손녀 안나 마리아가 태어났다. 얼마 후 앙리에타 마리아는 콜롱브 성에서 사망했는데,[194] 사인은 아편 과다 복용이었다.[190] 그녀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고, 심장은 샤이요의 수녀원에 안치되었다.[195]
3. 자녀
(2) 1673년 모데나의 메리와 결혼; 자녀가 있음